금본위제(金本位制, Gold standard)의 역사
금본위제도란 세계 경제 역사에서 가장 무겁고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경제 체계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가치를 금에 고정시켜 기존의 통화 개념 자체를 뒤흔든 대전환이었고, '신뢰의 본질이 무엇인지', '탄탄하게 구성된 화폐 경제의 신뢰를 기반으로 세워진 사회가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경제사 전반에 걸쳐 근본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되풀이하여 던진 제도였습니다. 금이라는 실물 자산이 국가 간 신뢰의 기둥이 되고 화폐의 가치를 결정짓는 기준이 되던 그 시대는, 지금의 무형 자산 중심 경제와는 전혀 다른 철학 위에 세워진 질서였습니다.
불변의 금속을 화폐로 삼으려 했던 과거 위대한 제국들의 시도
사회적 약속을 강화하고 신뢰를 기반으로 경제를 성장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한 시도는 언제나 화폐의 가치를 통일하고자 하는 시도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대 제국들 역시 자국의 통치력을 강화하고 상업을 확대하기 위해 다양한 금속 화폐를 통합하고자 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고대 로마 제국의 수많은 화폐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인 데나리우스(Denarius)로 대변되는 금속 화폐입니다. 기원전 3세기 말, 로마는 다양한 은화를 통합해 데나리우스를 표준 화폐로 삼으며 제국 전역에서의 통일된 상거래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 은화는 이후 수세기에 걸쳐 로마 경제의 근간이 되었고, '로마의 화폐는 곧 제국의 가치에 대한 신뢰'라는 인식이 널리 퍼졌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화폐에 포함된 은의 함량이 점차 낮아지고 인플레이션이 심화되자, 데나리우스의 위상도 함께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는 실물 기반의 화폐 시스템이 가지는 물리적 한계를 일찌감치 드러낸 사례였습니다.
제국이 성장함에 따라 화폐의 수요는 늘어만 가는데, 은의 채굴량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로마는 데나리온 화폐의 은 함량과 순도를 지속적으로 낮추어 화폐의 희소성과 가치, 품질을 포기함으로써 거대해진 제국의 경제가 요구하는 화폐 주조량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결국 화폐 가치 자체 뿐만 아니라 제국에 대한 신뢰와 화폐 거래에 기반한 로마의 경제 제도 전체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 출처 : 로마인들은 우리에게 비트코인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 medium.com |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도 유사한 흐름이 존재했습니다. 한나라 시기에는 오수전(五銖錢)이라는 통일 화폐가 사용되었으며, 이는 다양한 지역 화폐의 난립을 종식시키고 세금, 공납, 시장거래 등 모든 경제 활동을 하나의 기준 위에 올려놓으려는 시도였습니다. 초기 한나라에서는 철화(鐵貨), 곧 철로 만든 화폐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금속의 무게와 보존성, 신뢰성 측면에서 결국 은화와 동화 중심의 체계로 재정비되었습니다. 황제의 권위 아래 국가가 발행한 표준 화폐는 곧 국가의 통치력과 직결되었으며, 그 신뢰는 군사력과 법령만큼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었습니다.
기원전 119년 한무제 원수(元狩) 4년에 처음 주조되어 당나라 초기인 621년까지, 장장 740년 간이나 사용되며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에서 가장 오랜 기간동안 통용된 법정 화폐, 오수전(五銖錢). 인천 영종도 운니동 출토 오수전 (복제품) / 소장 : 한성백제박물관 - 출처 : 가장 오래 통용된 화폐 오수전(五銖錢) |
이처럼 강대한 제국들은 실물 기반 화폐 시스템을 통해 경제 질서를 유지하려 하였고, 화폐의 신뢰를 공고히 하기 위해 통일된 기준을 만들고자 끊임없이 고민해 왔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은 훗날 금본위제라는 보다 정교한 형태의 통화 체계로 진화해 나가는 토대를 제공한 셈이었습니다.
금본위제도란 무엇인가?
금본위제란, 간단히 말해 화폐 단위가 일정량의 금에 연동되어 있는 통화 체계를 말합니다. 하지만 이 정의는 시작일 뿐입니다. 진정한 의미는 그 이면에 있습니다. 금본위제가 작동하던 시절, 우리가 쓰는 지폐 한 장은 단지 '교환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곧 '금에 대한 청구권'이자, 정부가 개인에게 '보관증을 가지고 온다면, 국가는 그대에게 실물 자산을 반드시 돌려주겠노라'는 것을 맹세하는 엄숙한 약속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1파운드나 1달러짜리 지폐를 들고 은행에 가면, 동일한 가치를 지닌 무게의 금을 건네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지폐는 실제 금이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다는 신뢰 위에 작동하는 증서였던 셈입니다. 오늘날의 화폐가 정부의 '신용'에 기대고 있다면, 당시의 화폐는 금이라는 실물 그 자체에 닿아 있었습니다. 종이 위에 인쇄된 숫자가 실제 금속의 무게와 등가를 이룬다는 이 단순하지만 강력한 전제는, 사람들에게 화폐에 대한 전례 없는 신뢰를 심어주었습니다.
'금 보관 증서', '이 증서를 가져온 자에게 동일한 가치를 지닌 양의 금을 내어주시오'. 최초의 지폐란 결국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
아이작 뉴턴과 영국의 금본위제 확립
금본위제는 우연히 시작된 제도가 아닙니다. 17세기 말, 천재 과학자 아이작 뉴턴이 영국 왕립 조폐국장을 맡으며 이 제도의 기틀을 세웠습니다. 뉴턴은 단지 중력의 법칙을 발견한 과학자가 아니라, 통화 안정의 개념을 경제에 처음으로 적용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는 은보다 금이 더 안정적이고 가치 보존력이 뛰어나다는 판단 아래, 파운드화의 금 중심 체제를 제안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1816년이었습니다. 영국 의회는 공식적으로 금본위제를 법제화하며, 금 한 단위에 대해 파운드화의 가치를 고정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영국은 세계 최초로 본격적인 금본위제를 실행한 국가가 되었고, 산업혁명으로 세계를 선도하던 시기에 파운드화는 곧 신뢰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조폐국장을 역임했고, 금화나 은화를 살짝 깎아내 이득을 보려는 화폐 훼손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동전 외곽에 홈을 파는 발명을 해내기도 하였던, 금본위제의 아버지이자 주식 투자의 대 실패자 아이작 뉴턴 경은 돈을 너무나도 좋아한 나머지 죽어서도 스스로 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
파운드화, 세계 금융의 중심에 서다
19세기, 세계는 급속도로 산업화되고 있었습니다. 대영제국은 식민지를 통해 금을 축적하고, 자국 통화인 파운드화를 국제 무역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금본위제 덕분에 파운드화는 금에 의해 뒷받침되는 '경이로운 안정성'을 자랑했고, 각국의 무역상들과 은행가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습니다.
이 시스템 하에서 환율은 각국 금 보유량에 따라 고정되었고, 국가 간 결제는 금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중앙은행은 금의 유입과 유출에 따라 이자율을 조절하며 경기 부양 또는 억제 정책을 시행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금 유입이 늘어나면 자국 통화 공급이 증가해 경기 확장이 가능했고, 금이 유출되면 통화를 조이면서 과열을 진정시키는 식이었습니다. 단순해 보이지만 강력하게 작동하던 이 원리는 국제금융의 핵심 메커니즘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금본위제의 빛과 그림자
빛 : 신뢰와 질서의 기둥
- 금본위제는 환율을 고정시켜 국제 무역을 더욱 예측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국가 간 신뢰를 강화했고, 투기성 자본의 변동을 줄이는 데 효과적이었습니다.
- 정부가 함부로 화폐를 찍어내는 일이 어려워졌습니다. 금이라는 실물이 화폐 발행의 상한선을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억제되고, 장기적인 물가 안정이 가능했습니다.
- 금이 존재하는 한, 화폐는 그 가치를 잃지 않는다는 확신은 대중에게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불황이 닥치더라도 금이 곧 신뢰의 보루가 되어주는 시대였습니다.
그림자 : 경직된 통화와 불균형
- 하지만 금은 무한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금광이 끊임없이 새롭게 발견되지 않는 이상, 경제가 성장해도 통화량은 제한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곧 디플레이션 압력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 경기가 침체될 때 통화 공급을 늘리는 유연한 대응이 불가능했습니다. 금이 없으면 돈도 없고, 돈이 없으면 소비와 투자가 얼어붙는 악순환이 반복됐습니다.
- 또한 금 확보를 둘러싼 국가 간 경쟁은 전쟁과 식민지 약탈로 이어졌고, 실제로 유럽 열강의 금 수탈은 제국주의와 함께 세계 각지에 심각한 상처를 남겼습니다.
미국의 금은복본위제, 그리고 갈등의 불씨
반면 미국은 1792년, 금과 은을 동시에 사용하는 복본위제를 채택했습니다. 하지만 두 금속의 시세는 시장에서 수시로 변했습니다. 금의 가치가 올라가면 사람들은 은화만 사용하고 금화를 저축해버렸고, 반대로 은값이 오르면 금화가 유통되고 은화는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양자 사이의 교환 비율이 고정되어 있지 않았기에, 결국 하나의 통화만 유통되는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이를 경제 용어로 간단하게 줄여 말하자면 그레샴의 법칙(Gresham's law)이라고 합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
(Bad money drives out good)
말 한 번 잘못 썼다가 길이길이 두고두고 조롱당하는 허지웅 님...![]() 쿄진 도모메... 쿠치쿠시떼야루! |
귀족들이 부의 축적 수단으로 금화를 비축하고 가치가 낮은 은화와 동화만이 시장에 유통되던 고대 로마 시대에 나타났던 현상이 약 2천여 년이 지난 후 미국에서도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금은복본위제 하에 제시된 두 화폐 중 가치가 낮은 쪽이 유통되면서, 가치 있는 금화는 시장에서 점차 사라지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자본가나 투자자가 아닌, 실물 경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래와 물품 대금 지급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고, 고대 로마 시대에도 이미 관찰되었던 현상이 2천년이 지난 근현대 미국에서도 똑같이 재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불안정한 상황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더욱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야기합니다. 동부의 금융자본가들은 금본위제를 지지하며 통화가치를 안정시키고자 했고, 서부 농민과 노동자들은 은화 확대를 통해 통화를 늘리고 부채 부담을 줄이려 했습니다. 이 갈등은 곧 '화폐 전쟁(Money War)'이라는 정치적 격랑으로 번졌습니다.
프랭크 바움의 동화, 금본위제를 풍자하다
채무에 허덕이던 농민과 노동자들은 화폐 발행량을 늘려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화폐 가치를 하락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금은복본위제를 지지하고, 은화를 법정 화폐로써 통합시키기를 바랐습니다.
반면 자본가들과 은행가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많은 부를 소유한 그들은 금화만이 절대가치를 지니는 금본위제를 공고히 유지하여 인플레이션과 통화 팽창을 억제하고 통제할 수 있기를 바랐고, 결과적으로 화폐 가치를 유지하고 싶어했습니다.
통화 정책의 개혁에 대해 이러한 계층 간 갈등과 논쟁이 극심해지고 있을 때, 1896년 대통령 선거에는 두 후보가 등장합니다. 금화만이 절대적인 통화로써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금본위제와 자본가들의 수호자, 공화당의 윌리엄 매킨리(William McKinley, 1843~1901)와, 은화를 함께 유통함으로써 통화량을 늘려 공황 상태에 놓인 미국 경제에 숨통을 트이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금은복본위제의 수호자, 민주당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1860~1925)이 대선후보로 맞붙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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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과 자본가, 은행가를 대변한 윌리엄 맥킨리 VS 은과 농민, 노동자를 대변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 출처 : 현대사와 민주주의 및 정부로부터의 학습 여정, 투표에 대한 외교 정책: 역사적 사례, 1900년 맥킨리 대 브라이언 선거와 오늘날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전략 |
19세기 말엽, 미국에서 벌어진 금과 은 사이에서 벌어진 대전쟁의 승자는 누구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과는 금의 승리였습니다.
상인들과 자본가, 은행업자들의 승리였고, 농민, 공장 노동자, 인부들의 패배였습니다.
미국 제25대 대통령 매킨리의 대선 승리.(좌), 금과 은의 싸움에서 금이 승리했음을 보여주는 풍자화 'THE SURVIVAL OF THE FITTEST(적자생존)'.(우)
출처 : wikipedia |
『오즈의 마법사』의 작가 프랭크 바움은 이 동화를 통해 금 본위제가 탄생하던 시절의 미국 사회에서 벌어진 화폐 전쟁과 계급 갈등을 은유적으로 풀어냅니다.
≪프랭크 바움의 동화는 이 모든 과정을 묵묵히 지켜본 뒤 세상에 나왔습니다. 대체 왜? 아마 격렬한 화폐전쟁 시기를 살아간 민초들에 대한 헌사요, 실패한 저항에 대한 울분을 담으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차근차근 줄거리를 되새겨보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도로시가 토네이도에 휩쓸려 날아간 곳은 오즈라는 동네의 서쪽 끝입니다. 혼란에 빠진 서부의 이미지가 포개집니다. 마녀의 은색 구두를 신고 길을 나선 도로시는 양철 인형(상공업, 노동자), 허수아비(농민), 목소리만 큰 사자(정치인)를 만나는데, 이들의 소원을 들어줄 마법사가 동쪽 끝(워싱턴DC)에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노란 벽돌길'을 따라 여행을 이어갑니다. 금본위제도에 대한 은근한 조롱입니다. 그러나 푸른색 에메랄드(금권정치)로 치장된 집에 갇혀 사는 마법사는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고 도로시의 '은색 구두'야말로 소원을 들어줄 신통한 물건이라고 고백합니다. '은화가 대안이다!'≫ |
파운드→달러, 전쟁이 바꾼 화폐 패권, 브레턴 우즈 체제로 인해 달러가 금을 대신하다
제2차 세계대전은 단지 군사적 충돌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금융질서를 뒤흔든 분기점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으로 유럽 각국의 경제는 붕괴 직전에 이르렀고, 영국조차도 자국의 금을 대량으로 미국에 넘기며 군수물자를 구매해야만 했습니다.
반면 미국은 본토가 전쟁 피해에서 벗어나 있었고, 중립국으로서 유럽 대륙에 무기와 원자재를 공급하며 막대한 양의 금을 흡수했습니다. 미국은 단숨에 세계 최대 금 보유국으로 올라섰고, 금본위제의 실질적 기반을 영국 파운드화에서 미국 달러화로 이전시킬 수 있는 힘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의도한 것인지 의도하지 않았던 것인지, 얼떨결에 영국으로부터 압도적인 금 보유량 패권을 빼앗아 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금의 집중은 훗날 브레턴우즈 체제를 뒷받침하는 결정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달러는 사실상 금의 역할을 대행하게 되었고, 세계 각국은 미국 달러를 외환보유고로 축적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 기축 통화의 탄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체제도 영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전쟁과 군사비 지출, 복지 확대 등으로 인해 미국은 실제 보유한 금보다 훨씬 많은 달러를 발행했고, 이를 외국에 공급했습니다. 미국은 이 과정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금 보관창고'가 되었지만, 보유한 금 이상으로 찍힌 달러는 결국 금 태환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이때 프랑스 정부가 강력하게 움직였습니다. 프랑스는 "우리가 가진 달러를 금으로 바꿔 달라"며 보유한 달러를 금으로 환수하고자 했고, 프랑스가 먼저 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스위스, 스페인, 영국 등 유럽 대부분의 나라들 또한 미국에게 금을 돌려받길 원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엄청난 발표를 해버립니다. 1971년 닉슨 대통령은 "앞으로는 달러를 가져와도 금으로 바꾸어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금 태환을 공식적으로 중단했습니다. 이것이 금 태환 중지 선언입니다.
1971년 8월 15일에 발표된 금태환 중지 선언, 일명 닉슨 쇼크(Nixon shock). |
공식 명분은 베트남 전쟁과 과도한 복지 지출이었지만, 사실상 미국은 달러가 금을 대체하는 국제통화로서 영속적인 지위를 획득하려는 전략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금이 아닌 '초록색 종이 쪼가리'에 얼마나 신뢰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불에 타고, 물에 젖고, 찢어지고, 썩을 수 있고, 없어질 수 있는 초록색 종이는 금덩이에 비해 너무나도 쉽게 훼손되었습니다. 페트로 달러 시스템(Petro Dollar System)은 바로 이런 불안을 상쇄하기 위한 장치로 만들어 졌습니다.
페트로 달러 체제의 확립과 거래 시 달러만을 사용해야 하는 석유 무역
1974년부터,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간에 이루어진 비공식적(?)인 협정을 통해 사우디산 석유는 달러로만 거래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미국이 군사적, 경제적으로 사우디 왕가의 권위를 인정하고 물심양면 지원해주는 대가로, 사우디는 달러로만 석유를 팔고 그 수익의 상당 부분을 미국 국채 등에 재투자하는 구조였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페트로 달러 체제'는 전후 미국 달러의 영향력을 유지시키는 핵심 축이 되었습니다.
1973년 11월 8일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국왕을 찾아 회동을 나눈 헨리 키신저 제56대 미국 국무장관. - 출처 :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10) '화려한 음모'㊥"원유는 달러로만 사라" |
1974년 7월 15일, 정상회담을 가진 닉슨 대통령과 파이살 국왕. 이들의 만남은 향후 '페트로-달러 체제'의 향방을 결정지었습니다. - 출처 : 영화로 쓰는 세계경제 위기史(10) '화려한 음모'㊥"원유는 달러로만 사라" |
반면 달러가 아닌 다른 것으로 석유를 거래하려던 일부 국가의 정치 지도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미국의 무시무시한 분노와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이라크의 후세인, 리비아의 카다피 등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 : 감히 달러가 아닌 무언가로 오일을 거래하려고 하다니! 전 세계에 본보기 삼아 비참한 꼴로 붙잡아서 질질 끌고 와 법정에 세우고 온갖 모욕을 준 뒤 종국에는 목을 매달아 죽여주마! |
이들은 달러가 아닌 유로나 금 등으로 석유 거래를 시도하다가 미국의 강력한 경제적, 군사적 제재에 직면했습니다. 그들은 미국의 감시 아래 지구 끝까지 추적당해 암살당하거나 사로잡혀 처형당하고, 종국에는 정권이 붕괴되어 국가 체제가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감히 달러의 권위를 위협하는 자는 인류 역사상 최강의 슈퍼 파워, 대 아메리카 형님이 절대로 가만두지 않고 반드시 때찌때찌 합니다.
??? : 뭐... 석유를 달러 이외의 화폐로 결제해보고 싶으시다구요? 한 번 해보세요... 세계 어디에 계시든 자유롭고 정의로운 민주주의 배달 시스템이 벼락같이 도착할 것입니다. 폭격기와 항공모함, 정밀 위성 정찰을 동반해서요! |
동화 너머의 경제사, 금의 그림자를 다시 보다
암호 화폐의 등장과 신용 화폐 가치의 몰락으로 인해 현재 지구 곳곳에서는 금본위제가 다시 부활할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벌어진 경제적 갈등과 계층 간의 균열, 그리고 금융 권력의 집중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형태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가치란 무엇인가', '신뢰는 어떻게 쌓이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금으로 대표되던 실물 자산이 사라지고, 디지털로 대체된 오늘날에도 그 핵심 원리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저 겉모습만 달라졌을 뿐입니다.
『오즈의 마법사』는 단순한 아동 동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금본위제라는 공고한 제도 속에서 한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분노와 좌절, 그리고 작은 희망까지도 담아낸 우화였습니다. 그리고 그 우화는 오늘날 우리가 '돈'이라는 것의 본질을 다시 성찰하게 만드는 거울이 되어줍니다.